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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tahr) - re:nier 화자 분석

현수현 2025. 3. 18. 00:00

일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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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은

느끼세요

시끄럽고 듣기 싫고 뭔 소린지 모르겠는 것마저 자연스러운 탈의 해석입니다

꼭 텍스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탈은 이야기만으로 환원되지 못합니다

탈은 노래이면서 노래 아닌 것이기도 합니다

그냥 보고, 듣고, 느끼세요

그중에 적절하거나 부적절한 건 없습니다

아이스테시스가 로고스보다 근원적인 진리의 자리에 있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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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의 전제 세 가지

1. 화자 분석의 입장에서 이아직과 리니어는 다르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성경 해석 법칙을 따른다.

3. 서사 구조를 지닌 텍스트라고 가정하고 해석한다. 그러나 탈은 텍스트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3

 

설명할 때 하이데거의 철학—논리 구조를 빌려왔으나, 필자는 비전공자이며 단순 교양으로 공부했을 뿐입니다. 때문에 해석이 틀렸을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4

 

존재는 있음[to be]를 뜻하는 말이며, 존재자라는 말은 있는[존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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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일러두기

 

탈의 밖에서

1. 탈이라는 제목

2. 탈의 역사

 

탈의 안으로

1. 나를 위하지 말아요

2. 나를 꽤 몰라 주세요

3. 세계는 언제나 모두 알듯 그렇게 말예요

4. 알고 싶은 나는 몰래

 

'나'와 '그대'에서 '우리'에 이르기까지

1. 탈과 오르카의 비교

 

닫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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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이라는 제목

곡 제목의 뜻은 2023년 12월 31일 빅팀 공연, 2024년 3월 23일 야광운 공연에서 직접 밝힌 바 있다. 가면의 뜻을 지닌 탈과  뜻밖에 일어난 걱정할 만한 사고를 뜻하는 탈을 동시에 가리키는 동음이의어이다. 이러한 중의성을 목적으로 영제로 'tahr'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각주:1]

 

특히 야광운에서는 자세히 설명했는데, 탈 쓰다가 탈 나지 말자라는 뜻으로 그 두 의미를 선택했다. 작사가인 이아직의 발언임을 차치하고서라도,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탈의 테마는 이분법을 가정한 이중성이다. 즉 이항대립의 틀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탈(mask)이라는 사물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표지이자 매개체이기 때문에 이를 상징하기에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탈은 나(안)와 세계(밖)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자의 노래인 까닭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더 나아가기로 했다. 탈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 '타다'의 활용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탈은 이미 불'탄' 자가 불'탈'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래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탈'이라는 발음을 위하여, 다시 말해서 '탈'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여러 뜻을 동시에 함축하려 그러한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동사의 활용이라는 해석도 틈 사이를 비집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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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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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은 리니어의 기타이자 보컬인 이아직이 작사·작곡한 곡으로 그 원형은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데모로 들을 수 있다. 

 

 

탈 - cassette tape demo draft

나를 위하지 말아요 춤을 무르게 두어요 멈춤 없이 울게 물어 나를 위하지 말아요 나를 꽤 몰라 주세요 나뭇잎 없이 바짝 탄 그대가 버린 늦 장작 처럼 나를 꽤 몰라 주세요 세계는 언제나 모두

soundcloud.com

 

2010년대에 쓴 곡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들 수 있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왜 10년 전 곡이 '리니어'라는 밴드를 통해서야 겨우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왜 솔로가 아니라 밴드로 이 앨범을 발매했을까?

 

위 내용에 따라서 탈이 리니어 곡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게다가 이아직이 리니어에 가장 먼저 들고 온 노래도 탈이다. [각주:2]야광운에서 이아직이 탈을 두고 시작하는 곡이라고 칭한 것이 여러모로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가장 오래되었고, 처음 만들어진—부서졌으면서 리니어-시-세계의 단초가 되는 곡.

 

작곡 당시에는 리니어에서 쓰는 텔레캐스터가 아닌 깁슨 335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이아직에게 두 기타는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텔레캐스터는 차가운 소리, 깁슨 335는 따뜻한 소리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왜 탈에서 깁슨 335를 썼을까. 앰프를 연결하지 않았을 때 현이 울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앰프를 연결했을 때 335의 소리는 탈과 어울리지 않으며, 리니어에서는 오직 텔레캐스터만 사용하기 때문에[각주:3] 탈은 차가운 소리를 내는 텔레캐스터로 연주를 하게 되었다. 

 

데모를 들어보면 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기타 솔로나 격렬한 감정 표현 없이 잔잔하게 연주된다. 실제로 탈의 기타 솔로는 편곡 과정에서 권석원과 구교선의 요청으로 기타 솔로를 넣게 되었다. 해당 파트를 처음 만들었을 때가 아래 트윗의 클립과 같다. 탈을 포함해서 리니어 노래 중 파괴적인 사운드는 대부분 구교선의 편곡이라고 볼 수 있다. 

 

 

X의 eeajik님(@_eeajik)

리니어 탈 기타 솔로 극 초안. 정말 맨 처음 짠 날이네 ..

x.com

 

2

 

데모 버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발매된 음원과 차이가 있는 부분은 볼드로 처리했다.

나를 위하지 말아요
춤을 무르게 두어요
멈춤 없이 울게 물어
나를 위하지 말아요

나를 꽤 몰라 주세요
나뭇잎 없이 바짝 탄
그대가 버린 늦 장작처럼
나를 꽤 몰라 주세요

세계는 언제나 모두
알듯 그렇게 말예요
동그라미로 이루어져
멈추려 들지 않아요

알고 싶은 나는 몰래
죽은 꽃 사다 묻어 보네
이런 건 불태워 버릴까
돌아 오세요

 

 

2020년 AOR 공연에서는 그대가 버린 늦 장작처럼이라고 말하지만, 2021년 히피토끼 단독공연부터 어제쯤 버린 늦 장작으로 가사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위 두 니어 라이브에서는 묻어 보네인지 물어 보네인지 발음이 확실하지 않으나 라이브 방송 중 탈을 건반으로 연주할 때 '물어 보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세션 없이 혼자 부른다는 점에서 데모처럼 부르는 것으로 본다. 리니어의 탈과 이아직의 탈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2023년 8월 2일 '리니어'의 이름으로 음원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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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직은 딜레이 릴레이 슈게이즈 페스티벌 2025 인터뷰 중 자작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 탈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탈의 제목과 메타데이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곁텍스트는 모두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탈의 안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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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지 말아요

춤과 멈춤, 삶과 죽음, 묻음과 물음

나를 위하지 말아요
춤을 무르게 두어요
멈춤 없이 울게 물어
나를 위하지 말아요

 

첫 소절부터 탈의 화자는 자신을 위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드는 의문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나를 위하지 말라는 요청은 누구에게 가닿는 말일까? 둘째, 나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시 말해서, 나를 어떻게 위할 수 있는가?

 

탈의 화자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다. 무엇을 요청한다는 것은 그 요청받은 사람의 존재를 암시한다. 여기서는 요청받은 자를 '그대'라고 칭하겠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가?

나를 위하지 말아요
춤을 무르게 두어요
멈춤 없이 울게 물어
나를 위하지 말아요

 

'나'는 춤을 무르게 둘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런데 춤을 무르게 두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생략된 주어들을 살려서 다시 생각해 보자.

나를 위하지 말아요
(내가) 춤을 무르게 (그대가) 두어요
멈춤 없이 울게 물어
나를 위하지 말아요

 

'춤을 무르게 둘 것'을 요청받은 자는 역시 '그대'일 것이다.

 

여기서 '춤'이 두 명이서 함께 추는 춤이라면 첫 번째 주어가 '내'가 아니라 '우리'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다른 리니어 노래들의 화자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와 '너'의 등장이자 이분법은 플라네르, 탈, 해록의 허무 등에서 드러나는 모티프이다. 그리고 탈은 그중에서 이분법이 가장 심한 노래이다. 플라네르와 해록의 허무의 '나'는 '너/당신'[각주:4]에게 질문[각주:5]이라도 할 수 있는 처지이다. 그러나 탈은 그렇지 않다. 제목부터 탈을 쓴 '나'의 이중성을 암시하는 단어인데 심지어 '나'와 '그대'를 하나의 공통 주어로 엮기는 어렵다. 이에 생략한 주어라도 '우리'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다. 

 

춤을 무르게 두라는 것은, 춤을 더 이상 추지 아니하게 두라는 것이다. '나'는 춤을 그만 추고 싶어 하고, '나'는 '그대'에게 그것을 말리지 말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를 위하지 말아요
춤을 무르게 두어요
멈춤 없이 울게 물어
나를 위하지 말아요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이 곧 춤을 무르게 두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은  또한 '멈춤 없이 울게 물어'이기도 하다. 2행과 3행은 '춤'이라는 글자가 직접적으로 겹치고 간접적으로 '무르게'와 '물어'라는 단어가 겹치기 때문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춤은 움직임을 뜻하는 말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곧 삶—살아 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춤을 무르게 두'는 것은 삶을 무르게, 삶을 멈추게 두라는 것이다. 즉 '나'가 지향하는 것은 멈춤이고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멈춤 없는(반복하는)' 것이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멈춤 없다는 것은 멈추지 아니함을 뜻한다. 이는 곧 움직임을 의미하고 이는 '나'가 바라는 바와 반대이기 때문이다. 

 

이제 '울게 물어'를 해석할 차례다. '울게'를 형태소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울다(to cry)의 어간 울--게

= 울게

 

여기서 부사형 전성 어미 '-게'는 사동 표현에서도 사용되는 것으로 목적의 뉘앙스를 나타낸다. '울게 하다'의 예시를 생각해 보자. 

 

이 행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물어'이다. 여기서 이 물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꽤나 난감했었다. 별다른 단서 없이 같은 연에 있는 '무르다'의 준말 '물다'로 해석해 보았으나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았다. 여기서 단서는 이후 4연 2행 '죽은 꽃 사다 묻어 보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묻어 보네'는 곧잘 '물어 보네'로 발음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묻다(to bury)의 어간 묻- + -어/아

= 묻어

 

묻다(to ask)의 어간 묻- + -어/아

= 물어

 

즉 동음이의어 묻다의 서로 다른 활용 양상을 통한 중의성을 의도하고 작성된 가사인 것이다.

 

'물어'는 '질문을 하여'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묻는다고 한다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묻는지 이 세 가지 논항이 필요하다. 여기서 '누가', '누구에게'는 각각 '그대'와 '나'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무엇을'에 해당하는 구성 요소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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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꽤 몰라 주세요

도구적 의미 연관, 은폐와 탈은폐, 현존재의 고유함

나를 꽤 몰라 주세요
나뭇잎 없이 바짝 탄

어제쯤 버린 늦 장작처럼
나를 꽤 몰라 주세요

 

아까의 "나를 위하지 말아요"처럼 대뜸 '나'를 몰라 달라고 요청한다. 마찬가지로 요청한다는 것은 요청받는 사람을 전제하는 것으로, 여전히 그대에게 전하는 말이다. 위와 비슷하게 질문할 수 있다. 나를 모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나를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나를 꽤 몰라 주세요
나뭇잎 없이 바짝 탄

어제쯤 버린 늦 장작처럼
나를 꽤 몰라 주세요

 

'어떻게'의 빈칸에 들어갈 말은 '나뭇잎 없이 바짝 탄, 어제쯤 버린 늦 장작처럼'이다. 그래, 말로는 알겠다. 그런데 모든 수식을 떼고, 장작처럼 자기를 몰라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장작이 사전에서 무슨 뜻인지 알아보자.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pageSize=10&searchKeyword=%EC%9E%A5%EC%9E%91

 

땔나무는 땔감이 되는 나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장작은 그냥 나무가 아니다. 그건 땔감으로 '해석된' 나무이다.

 

여기서 해석되었다는 뜻은 다음과 같다. 나무는 '태워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무다. 나무는 거기에 그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추위를 느껴 불을 피워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 나무는 베어서 쪼개고 태울 수 있는 연료로 보인다. 인간의 생활을 위해 도구의 목적을 가지지 않고 태어난 것을 생활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게 되는 현상을 두고 '해석'되었다고 한다.

 

단지 물건만 그런가?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도 이런 경향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학생이라면, 학교라는 같은 공간에 있는 또래는 '같은 반 친구'로 생각하고, 그곳의 연장자는 '선생님'으로 생각하게 된다. 직업을 넘어서 사적인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미 친구인 사람을 친구가 아닌 낯선 사람으로 볼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러한 이름(명사)으로만 그 상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나에게 어떤 이름으로 해석된 존재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명사의 이름으로 나에게 알려진다—탈은폐된다. 동시에, 그들은, 그 집합 원소로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 은폐된다. 무엇을 아는 것은 동시에 무엇을 모르게 되는 것과 같다. 즉 존재론적으로 진리는 존재 자체의 탈은폐이기도 하고 은폐이기도 하다.[각주:6]

 

그렇게 '나'는 그냥 '나'가 될 수 없고 누군가의 '친구', '연인', '동료'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고 개념화되는 것이다. 물론, '나'라는 존재는 대체할 수 없이 고유한 것이다. 현존재(인간)는 어떤 본질로도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네 생활 세계에서는 그런 고유한 존재인 인간을 그대로 대하기보다는, 어떤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데 너무나도 익숙해지고 말았다. 인간은 도구로 쓰일 사명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 속에서 대체 가능한 것으로 '쓰임'을 다한다. '해석'되었다.

 

탈의 화자인 '나'는 딱 그만큼만 자신을 알라고 부탁한다. 각 나무마다 고유한 나이테와 무늬가 있지만 잘리고 쪼개지면 그저 태울 장작이 되는 것처럼. 어떤 장작이 다른 장작과 구별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장작을 '장작'으로 알고 있다면 사실 그건 장작을 모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장작을 구분할 능력도 의지도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것으로서의 장작으로만 알고 만다.

 

게다가 비유되는 '장작'은 이미 쓰임을 다했다. '나뭇잎 없이 바짝 탄' 것이기 때문이다. 쓰임을 다한 도구는 버려진다. 도구라는 것은 고유하지 않아서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 가위가 망가진다면 망설임 없이 새것을 사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어제쯤, 언제 버렸는지도 모르는 도구처럼 자신을 대하라는 것이다.

 

1연과 2연 모두 '나'는 대부분 목적격 조사 앞에 위치해 있고숨겨진 '그대'라는 주어는 계속해서 행위의 주체로 나타난다는 점도 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만하다. '나'는 행위를 당하는 존재자다. '그대'는 행위의 주체다. 그리고 주체는 목적(대상)을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폭력을 지녔다. 주체는 그 힘으로 대상인 타자를 자신에게 익숙한 것으로 만든다. 타자는 주체에게 안전하고 익숙한 것으로서만 알려진다. 그리고 그 타자화는 주체가 보고 싶어하지 아니하는, 타자의 일면이 은폐되었음을 암시한다.

 

정리하자면, 장작처럼 '나'를 몰라주라는 것은 '나'를 대체 가능한 것으로서, 도구처럼, 고유하지 않게만 알아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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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언제나 모두 알듯 그렇게 말예요

일상 세계, 은폐와 탈은폐

세계는 언제나 모두 알듯
그렇게 말예요
동그라미로 이루어져
멈추려 들지 않아요

 

여기서 '그렇게'가 받는 내용은 바로 앞 '장작'의 내용이다. 문장을 읽기 쉽게 바꾸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세계 언제나 모두 알듯
그렇게 나를 몰라 주세요
동그라미로 이루어져
멈추려 들지 않아요

 

생활 세계, 일상 세계는 우리가 생계를 꾸려나가는 현실을 뜻하는 말이다. 일상 세계는 우리에게 질서와 규범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 이성(logos)으로 우리는 세계를 서로 다른 것끼리 구분 짓는 법을 알게 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주체는 이성으로 자신에게 위험하고 낯선 세계를 안전하고 익숙한 것으로 만든다. 구분(이름) 짓는 것은 그 일의 일부이다. 단순한 예시를 들어 보겠다. 우리에게 언어가 있고, 나와 나-아닌-것을 구분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와 다른 너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 일상 세계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그리고 그곳에 충분히 적응해 있다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각주:7]  

세계는 언제나 모두 알듯
그렇게 말예요
동그라미로 이루어져
멈추려 들지 않아요

 

동그라미로 이루어졌다는 건 세계—지구를 뜻하는 말일 테다. 멈추려 들지 않는다는 말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탈의 화자는 움직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를 여실히 드러낸다. '-하려 들다'에서 '들다'는 보조 용언으로, 그 자체로는 명확한 뜻은 없지만 본용언('-하려')의 사태를 부정적으로 강조하는 역할을 맡는다. '나'는 멈추려고 하지만, '세계'는 멈추려 들지 않는 대립이 드러난다.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pageSize=10&searchKeyword=%EB%93%A4%EB%8B%A4

 

그러니 딱 그만큼만,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로만, 생계를 꾸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고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세계, 타인, 자기자신을 아는 것처럼 자신을 그 정도만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는 것은 '나'를 모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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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은 나는 몰래

자기자신의 무화

알고 싶은 나는 몰래
죽은 꽃 사다 묻어 보네
이런 건 불태워 버릴까
불태워 버릴까
불태워 버릴까
돌아오세요 

 

이제 '나'가 행동할 차례다.

 

'나'는 세계를 알고 싶어 한다. 알고 싶다는 것은 세계를 모른다는 뜻이다. 모르기 때문에 알기를 바랄 수 있다. 이미 손에 쥔 것을 갖고 싶어 할 수 없듯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싶어 할 수 있듯이. 

 

그렇다면 '나'는 세계를 어떻게 알고 싶다는 것일까? 세계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세계라는 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된 것으로 세계이자, 일상의 터전이면서, 그 무엇이든 가차 없이 도구화하는, 규범화된 일상 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존재자는 부단히 자신의 죽음을 살도록 내몰린다—일상적인 자기를 자기 아님으로 심판하고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주:8] 위에서 일상 세계는 우리에게 규범과 질서를 선물했다고 설명했다. 그 규범과 질서라는 것은 규범 밖, 질서 밖의 것을 상정한다. 우리네 세계의 법과 도덕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옳은 것'을 외치지만 그 그늘에 '그른 것'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그른 것'은 언제나 규범과 질서의 이름으로 심판당해 마땅한 것이다.

 

탈 화자는 그 전형과 반대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 세계를 '나'는 모른다. 그러니 '나'는 일상 세계에서 죽은 것,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일상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비일상적인 자기를 자기-아님으로 부정해야 한다. 살기 위해서. 현존재[인간]가 삶을 꾸려갈 장소는 일상 세계뿐이고, 탈 화자는 이미 그 세계에서 내쫓기고 버려진 것이므로. 물론 '비일상적'이라는 것은 다분히 그대와 세계의 기준에서이겠지만.

 

그러니 비일상적인, 이질적인, 이방인인—공동 현존재도 못되어 스스로 말할 수조차 없는 식물에 비유되는 '나'는 그들의 세계로 편입되고자그리고 공동 현존재로 승격되고자 비일상적인 자기를 죽여야 한다. 그러한 자기를 죽여서없애서 일상적인 존재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의 근거는 죽은 꽃에게 행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나'는 그대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존재자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타서 죽은 존재자이다. 그런데 '나'가 말하고 있다면, 그러니까 이 노래가 들린다면 그건 '나'가 말을 하는 것이다. '나'가 말을 한다면 '그대'는 '나'의 앞에 없는 것이다. '그대'가 부재해야만 '나'는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고 싶은 나는 몰래
죽은 꽃 사다 묻어 보네
이런 건 불태워 버릴까
불태워 버릴까
불태워 버릴까
돌아오세요 

 

나를 위하지 말아요, 부분에서 울게 물어라는 동사의 주체는 '그대'이다. 멈춤 없이 (질문을) 묻고 (땅에) 묻는 것은 그대이기 때문에. 그대가 있을 때 나는 주어가 아닌 대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죽은 꽃의 앞에서 그 언어유희를, 질문의 형태를 한 죽임을 되풀이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쓸모를 다했다. 그러니 당신을 버리겠다."라는 말을 듣는다고 상상해 보라. 그 말은 곧 "(너를) 불태워 버릴까?"라고 묻는 질문과 같다. 그 질문은, '나'에게 묻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묻는 것이다. 그 질문은 '나'를 죽이는 것으로 물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나'가 한다는 것은, 죽은 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연쇄는 다음과 같다.

 

차마 말하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는 자를 죽인다. ('나'가 당한 행위를 뒤집어 스스로 주체로 행한다.) 

→ 나는 그대의 행동을 되풀이한다.

→ 나는 존재의 무화로써의 죽음이 도사리는 일상 세계를 아는 자가 된다. 즉, 그대와 동격이 된다.

 

나는 죽은 꽃에게 묻고, 죽은 꽃을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자기를 죽이는—세계를 모르는 나를 없애는 것이다. 여기서 땅에 묻는 것은 그 자체로도 죽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아직은 땅에 묻는 것과 질문을 묻는 것이라는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질문을 묻는 것이 곧 땅에 무언가를 묻어서 죽이는 것이라고 동일시하면서 이미지를 구체화했다.

 

꽃을 불태워 버리겠다는 말로 '나'가 당한 행위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장작이고, 불태워져서 쓰임을 다해 버려졌다. 그러니 죽이는 방법 또한 배운 대로 되풀이한다. 식물을 태워 죽이는 것이다. (장작이 이미 죽은 나무인 것처럼, 태우려는 것도 이미 죽은 것이겠지만.)

 

그런데 나는 정말 꽃을 불태웠을까?

알고 싶은 나는 몰래
죽은 꽃 사다 묻어 보네
이런 건 불태워 버릴까
불태워 버릴까
불태워 버릴까
돌아오세요 

 

정말 불태웠다면 몇 번이고 후렴으로 반복해서 부를 필요가 있을까?

 

나가 꽃을 태우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세계를 모른다. 일상 세계 속 존재자로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태웠다 해도, 그건 트리비아한 복수에 그치고 만다.

 

'나'는 '죽은 꽃'에 자신을 투영하고, 자기자신은 '그대'가 된다. 죽은 꽃에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것의 근거는 그 이전에 자기자신을 말 못 하는 식물, 도구로 쓰이고 버려진 무언가, 그러니까 장작으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에게 당했던 일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되돌려 줄 수는 없기 때문일까.) 죽은 꽃을 '사고', '묻고', '멈춤 없이(반복해서)' 질문한다. "이런 건 불태워버릴까?"라고. 

 

이는 진정한 복수가 될 수 없다. '나'가 '그대'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죽은 꽃'에게 대물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내 다시 나를 위하지 말라고, 몰라 달라고 부탁하는—행동하지 못하는 수동적 화자로 돌아간 것이다.

 

알고 싶은 나는 몰래
죽은 꽃 사다 묻어 보네
이런 건 불태워 버릴까
불태워 버릴까
불태워 버릴까
돌아오세요 

 

'나'는 차마 스스로를 죽일 수도 없고 그만큼 다른 존재자를 죽일 수도 없는 가냘픈 자이다. 차라리 그대에게 죽임 당하기를 바라—침묵당해도 그대가 옆에 있길 바라 돌아오라고 요청한다.

 

돌아오라는 것은, 그대가 지금 내 옆에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

 

오르카와 탈의 비교

우리는 길을 잃어도 우리

차오르는 척
돌아서는 달은
어스름 엮인 채
이렇게 하얗게

우리는 여전히
갈 곳을 잃어요

빛을 담아요
빛을 담아요
빛을 담아요

백야를 바래요
흐드러지는 해무
수평선 너머로
이렇게 하얗게

빛을 담아요
빛을 담아요
빛을 담아요

빛을 담아요
빛을 노래해요

추락하는 달
사라질까 영원
어스름 엮인 채
이렇게 하얗게

 

오르카의 의의 중 하나는 세계(위에서 말한 그것)를 알든 모르든, '우리'는 여전히 '우리'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헤엄치는 세계는 여전히 죽음의 세계이다. 오르카라는 제목대로 화자의 우리는 범고래 무리를 말하는 것일 테다. (나를 죽인 자, 그대와 나를 함께 우리라고 엮을 수는 없으므로.) 그리고 범고래에게 세계는 물론 바다일 것이다. 바다는 이아직의 시-세계에서 긍정적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단어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바다는 느린 추락에서 파란 어둠이었다. 해우랑에서는 너른 검은 바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검은 바다는 죽음으로 도망쳐 익사를 맞이하는 장소이다. 윤슬이 눈부신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죽음이 넘실대는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한 달빛, 백야를 바란다. 내내 빛을 담기만을 한다. 그 빛은 구원 따위의 것으로 생각된다. (바다가 어둠이고 검은 것이므로 죽음의 반대 편에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그러나 빛을 발하던 달이 추락하니, 백야를 바라던 소원 따위 없었던 것처럼 되고 만다. 이것만 보면 오르카도 그렇게 희망찬 노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빛을 노래한다. 빛에게 내내 닿이길 바라다가 결국 스스로 빛이 된다. 탈의 화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에게 휘둘리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다가, 스스로 주체되기를 포기한 것에 비해 오르카가 우리로서 함께 빛을 노래하는 것,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탈의 화자는 혼자다. 이아직이 혼자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 아니다. 현실의 차원에서 리니어의 노래는 언제나 함께 부르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지금 말하는 '혼자라는 것'은 현실보다 낮은 가사 속 세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탈의 시-세계에는 탈 화자밖에 없다. 그곳엔 조소를 건넬 '당신'도, 마른 바다의 이름을 간직할 '너'도 없는 곳이다. '그대'는 이미 날 버리고 떠났다.

 

물론 꽃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꽃은 죽은 꽃이다. 만약 꽃이 살아 있더라도, 꽃이라는 것은, 화자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존재자이다. 그 꽃과 '나'가 함께 있다[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대'와 화자가 그러하듯이, 화자와 '꽃'도 대등하지 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당신 옆에 있는 사물을 두고 함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이토록 외롭고 쓸쓸한 노래이기 때문에 차마 솔로 셋[set]으로 부를 수가 없는 것이다. 리니어라는 삼위일체가 되어서야 겨우 무대 위에 올릴 수 있다. 3명이서 함께 연주하는 것으로 이 외롭고 쓸쓸해서 곧 죽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덜어낼 수 있는 것이다. 건반으로 연주하는 탈을 보면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건 이미 자기 자신을 죽이고 난 것 같은 소리다. 드럼과 베이스가 함께하는 목소리-기타여야만 무대 위에서, '살아서' 부를 수 있는 노래다. 그러니 탈은 역설적이게도 리니어라는 이름을 달고서야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리니어가 '리니어'이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노래에 탈과 오르카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혼자-함께의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서 있는 노래라는 점에서 이 둘은 관련이 깊다.[각주:9] '리니어가 아니면 올릴 수 없는 노래'라는 점에서 탈과 오르카는 통하고, 또 통하는 만큼 서로를 거울처럼 반대로 비춘다. 

 

✳︎

닫는 글

여기까지 탈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다. 소리나 무대 위 퍼포먼스에 대한 내용은 일부러 배제했다. 잘 모르기도 하고, 글이야 글로써 분석할 수 있다 해도 글 이상의 것은 담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이유로 탈에 대한 제대로 된 글쓰기를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 탈은 가사와 소리와 빛을 따로 구분지어서 감상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분석한다는 건, 최소 단위로 쪼개어 나눈다는 뜻을 함축하는데 그 작업이 탈의 뼈와 살을 풀어 헤치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무대 위에서, 내 앞에서 탈은 매번 낯설어지는 기이한 생명체이자 덩어리 같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리니어가 함께 부르는 탈은 이 정도로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글은 탈의 화자를 분석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왜 탈을 좋아하는지 소상히 돌이켜 본 흔적이기도 하다. 작성일 기준으로 작년 10월 경부터 탈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톺아보는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로부터 다섯 번의 보름달이 져서야 해묵은 글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글을 작성한 건 올해 1월부터였고, 방학 내로 끝장을 보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지금에서야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이아직 분의 생일인 3월 18일에 최종 발행할 것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동기가 아니라면 다음 방학이 되어서야 쓸 것으로 예상하여 조금 급박한 감이 있지만 여기서 글을 줄인다.

 

이미 수많은 트윗으로 탈 이야기를 했지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탈의 가사가 얼마나 치밀하게 쓰여 있는지 몇 번이고 깨닫게 되었다. 나의 감상이 이 글에 온전히 담겨 있길 바라며.

 

일러두기에서 말했듯, 탈은 음원을 듣고 공연을 관람하는 당신의 살과 몸에서 느껴지는 현상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탈의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수만 수천 가지, 탈이 우리에게 들리고 보이고 느껴질 때마다 새롭게 생겨난다. 그리고 이 글은 그 가능성 중 단 한 가지 갈래에 불과하다. 그저 글로 잘 정리되어 있을 뿐이다.

 

나의 해석이 탐탁지 않거나, 빌려온 논리 중 오개념이 있다면 편히 댓글로 지적해 주길 바란다.

 

✳︎

 

탈이라는 곡조와 그 가사를 쓴 이아직 분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탈이라는 노래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 준 구교선 분, 권석원 분, 그리고 그 셋의 리니어라는 밴드에게, 고맙습니다. 매번 이만큼 마음을 쏟을 것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름다움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고, 끝까지 부서져 내린 것은 더 이상 부서질 수 없어 강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탈이 그러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아직 분의 생일 선물로 이 글을 바칩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2025년 3월 18일 현수현 씀.

 

✳︎

 

열람 편의를 위하여 목차에 본문 내 하이퍼링크를 설정했습니다.

탈의 메타 데이터를 설명하는 글을 정리하고, 일상 세계, 탈은폐와 은폐에 대한 내용을 보강했습니다.

 

2025년 5월 2일 현수현 씀.

  1. 실제로 tahr이라는 단어는 염소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노래와 연관되는 부분이 없다. [본문으로]
  2. 리니어의 작곡 방법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째로 이아직이 기존에 만들어 둔 곡을 들고 권석원, 구교선과 함께 편곡한다. 탈이 이 경우에 속한다. 둘째로 합주 중 자연스럽게 가사와 이름이 붙여지는 경우가 있다. 오르카가 이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3. 앞으로 거듭 강조하겠지만 리니어의 노래는 '이아직의 노래'가 아닌 '리니어의 노래'이기로 선택·편집된 리스트이다. [본문으로]
  4. "붉은 너에 관한", "당신은 나에게 조소를 건넬까" [본문으로]
  5. "마른 바다의 이름을 간직하지 않을래" [본문으로]
  6. 한상연,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세창출판사, 2021, 18쪽. [본문으로]
  7. 일상세계와 현존재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 "일상세계 자체가 언제나 이미 규범화되어 있는 한에서, 새벽의 검은 젖(을 마심)은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방식 외에 다른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그 까닭은 윤리와 규범이 삶과 살림의 가능 근거일 뿐 아니라 죽음과 죽임의 가능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우리는 규범화된 일상 세계가 선물하는 질서의 젖을 마셔야 한다. 그러나 그 젖은 동시에 죽음의 젖이기도 한다. 질서를 세우고 보존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마땅히 존재할 자격과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상연, 『죽음을-향한-존재와 윤리』, 세창출판사, 2022, 76쪽. [본문으로]
  8. 위의 책, 54쪽. [본문으로]
  9. 순간경계도 '우리'를 썼기 때문에 포함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순간경계는 '나'와 '우리'가 혼재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이미지는 오르카가 가장 강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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